[신문스크랩] MB의 '베를린 제안'에 없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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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1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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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스크랩] MB의 ‘베를린 제안’에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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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5.10 한겨레 김종철 정치부 선임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9일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의 비핵화 합의를 조건으로 내년 3월 서울에서 예정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할 의사를 밝혔다. “통치자의 정치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메시지”라는 정부 당국자의 의미부여를 고려하면 이명박판 ‘베를린 제안’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 2000년 3월 남북 당국자간 대화를 제의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많이 닮았다.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을 방문하고, 베를린 시장에게 통일의 경험담을 듣는 일정이 똑같다. 남북관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던 상황도 비슷하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관계는 취임 후 2년간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도 지난 3년여 동안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꽉 막힌 남북관계를 뚫는 돌파구가 됐다. 특사 교환을 통해 그해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졌으며, 남북은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이 대통령의 ‘베를린 제안’도 전환점이 될까? 2000년 당시처럼 당국회담이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질까? 변수가 많아 속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정황으로 볼 때는 잘 풀릴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11년 전 디제이의 베를린 선언과 엊그제 엠비의 베를린 제안은 전후 맥락이나 접근법 등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김 전 대통령은 대북 화해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취임 후 동해안 무장간첩 침투(1998년 7월12일)와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 로켓 발사(같은해 8월31일), 1차 서해교전(1999년 6월15일) 등 북한의 도발이 이어졌지만, 금강산 관광을 개시(1998년 11월18일)하고 2차 베이징 비료 차관회담(1999년 6월21일)도 예정대로 열었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 이후 모든 대화창구를 닫고, 민간 차원의 대북 교류 및 지원조차 차단했다. 지난주 개각 때는 ‘강경기조 지속’을 알리기 위해 예정됐던 통일부 장관 경질도 번복했다.
둘째, 김 전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제안에는 “비핵화에 대한 국제사회와의 합의”와 “테러에 대한 사과”라는 문턱 높은 전제조건이 둘이나 달렸다.
셋째, 김대중 정부는 베를린 선언의 내용을 주변 4개국 미·일·중·러뿐 아니라 북한한테도 사전에 알렸다. 정치적 쇼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베를린 제안을 미국하고만 미리 협의했을 뿐 북한 등 나머지 나라에는 알리지 않았다.
넷째, 김 전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독일 통일은 남북한간 화해와 협력을 이루는 데 소중한 길잡이”라며 “통일보다는 냉전 종식과 평화정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비해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소원인 통일의 숨결이 느껴진다”며 통일 염원을 여러번 역설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북한의 반응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잖아도 흡수통일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판에 진정성도 안 보이는 제안에 응할 리가 있겠는가. 누가 봐도 현실성이 너무 없다. 이런 까닭에,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국내 정치용으로 베를린 제안을 했다는 음모론적 분석까지 나돈다.
남은 임기가 짧지만, 이 대통령이 북한을 변화시켜 남북관계를 진정 발전시킬 의사가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먼 독일이 아니라 가까운 디제이에게 배울 일이다. <김대중 자서전>과 <피스메이커> 등 출판된 책 몇권만 봐도 금방 답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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