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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모음] 수요시위 천 회, 벽을 문이라 여기고 부딪쳐 희망을 만들다 -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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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11.12.18

조회수 : 4,515

본문


<칼럼> 수요시위 천 회, 벽을 문이라 여기고 부딪쳐 희망을 만들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1.


1992년 1월 8일 수요일, 당시 일본 미야자와 총리가 방한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게 생존자임을 고발하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 국제여론에 서서히 오르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일본에서, 미국에서 ‘위안부’ 관련 군문서가 발견되어 일본군의 개입을 부인하던 일본정부의 입장에 대해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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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여성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였다.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시위를 수요일마다 계속하기로 결의한 후 행동으로 옮긴 첫날이었다. 2회, 3회, 4회... 수요일마다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적었다. 여성단체들도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으로 나오기에는 일들이 많았고 바빴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이 나오지 못하는 날에도 수요시위는 피해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져 갔다. 그 여자들은 외로웠다.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함께 연대해 달라고 간청을 해야 하는 상황, 그 부끄러운 짓을 뭘 그렇게 떠드는 거냐는 불편한 시선들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 지독한 외로움은 그래서 부끄러움이 되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여자들은 얼굴을 모자 속에 깊이 숨기기도 했고, 짙은 색 안경 속에 감추기도 했다.


 


100번째 수요시위를 하던 날도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영하의 날씨, 1993년 12월 22일이었다. 일본대사관 앞은 사람들과 경찰들로 붐볐고, 100차 수요시위는 진행되었다. 수요시위를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100번의 수요시위에도 변함없는 일본정부에 대해 규탄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은 하얀 소복을 입고 통곡했다.


 


그런데 어느새 1000번째 수요시위가 다가온다. 2011년 12월 14일이다. 100회째 수요시위 때나 일천 번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나 수요시위에서 외치는 구호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일본대사관 앞 일장기도 부끄러움 전혀 없이, 어느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고 여전히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다. 이 1000의 숫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2.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투사이셨던 할머니들. 내게 민족이 무엇인지, 여성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셨던 할머니들, 그러나 이미 손잡고 싶어도 손잡을 수 없는 할머니들의 얼굴. 그런데 아무리 할머니들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려 시도해도 되질 않는다. 슬픈 모습, 세월을 고스란히 안은 얼굴로 다음 세월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관 속에 누워있던 마지막 모습만이 떠오른다. 회색빛이다.


 


또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먼저 간 동료들의 몫까지 다하겠노라며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할머니들이다. 그런데 그녀들이 웃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본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하고, 한국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회색빛 할머니들의 얼굴에 홍빛이 돈다. 노랑, 분홍, 빨강색들이 할머니들의 몸에서 평화로운 향내를 피우더니 쭈뼛쭈뼛 긴장하며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를 띠게 한다.


 


‘돈’이 아니라고, ‘역사의 진실’, ‘역사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만들자’, ‘남북통일이 빨리 돼서 우리 땅에서 전쟁의 그림자를 제거하자’고 할머니가 말한다. 1이 10이 되고, 100을 넘어 1000이라는 숫자가 가까워지는 동안 이렇게 할머니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갔고, 멋진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가 되어갔다.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들이 매주 달라지고 있다. “할머니들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제가 커서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할머니들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할게요”, “외교관이 되어서…”, “변호사가 되어서…”, “인권운동가가 되어서…” 아이들이 저마다 할머니들 앞에서 다짐을 한다. 다시는 할머니들같이 아픔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할머니 뒤에서 깔깔거리고 웃으며 30분 내내 집중을 못하고 떠드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몸으로 느릿느릿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하고 부르는 소리에 금새 아이들은 조용해지고, 입술은 닫히며 눈동자는 초롱초롱 할머니에게서 역사를 배울 준비를 한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아이들의 발언이 이어진다. “이제서야 할머니들 찾아뵙게 되어서 죄송해요” 할머니 앞에서 죄송함과 감동이 뒤섞인 울음을 엉엉 토해내는 아이들도 있다. 노랑, 빨강 색으로 머리카락에 물을 들인 여고생들이 할머니들 앞에서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을 추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이상하게 혼자서 큰 소리로 계속 말하는 아이도 있다. 아마 조금 아픈 아이인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 속에서 그 아이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칭찬으로,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손잡음으로 달라져 간다.


 


검은색이 짙은 피부색을 가진 한 여성이 떠오른다. 아프리카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단다. 그녀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20년이 다 되도록 포기하지 않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로한 몸으로 세계 곳곳으로 다니며 전쟁의 광폭성을 증거하고, 그 전쟁 속에서 겪은 여성들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며 세계의 연대를 호소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인권운동가가 되었단다.


 


3.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을 포기합니다.”


오죽하면 국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셨을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내놓겠다고 했다. ‘왜 한국정부는 피해자들을 자국의 국민으로 보호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 절규했다. 그 절규가 하늘에 닿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냈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정부가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정부에게 구체적인 외교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피해자들의 기본권이 침해당했다는 정부의 부작위에 대해 ‘위헌결정’이 이루어졌다.


 


어쩔 수없이 헌법을 지켜야 하니, 외교통상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양자협의를 공식 제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하여 외교적 행동을 취한 것이다. 1000번의 수요시위가,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은 정대협과 할머니들의 투쟁이 만들어 낸 변화, 벽에 생긴 틈이었다.


 


“과연 정부가 할까?”하던 것이 “정말 외교부가 하나보네”로 변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은?” 여전히 대통령은 일본정부 앞에서 조용하게, 스스로 알아서 조신하게 움직인다. 변하지 않고 있다. 1000번의 수요시위에도, 20년의 투쟁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서울 한복판 일본대사관 위에 죄의식 없이, 제지당함 없이 당당하게 펄럭이고 있는 저 ‘히노마루’ - ‘전범국일본’이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4.


그러나 변할 것이다. 변할 수밖에 없다!


천 번째 수요시위, 그 날에는 세계 100여 개 나라 천 개의 지역에서 천 번째 수요시위에 연대할 것이다. 교실에서, 전시장에서, 극장에서, 거리에서, 일본대사관 앞에서, 공공건물 앞에서, “일본정부는 일본군‘위안부’ 제도에 대해 국가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라!”, “공식사죄와 법적 책임을 이행하라!”, “올바른 역사교육 실시하라!” 요구들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한국에서도 전국적으로 일본정부를 향해, 한국정부를 향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는 함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서울, 일본대사관이 있는 평화로에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시민들로 가득차고, 춤으로, 연설로, 우리가락으로, 함성으로 죄짓고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일본에게 두려움을 갖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에 조용한 소녀상이 평화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질 것이다. 열세 살, 열네 살 어린 소녀시절에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던 모진 세월, 그 시간들을 견디면서 품었던 희망, 해방이라 할 수 없는 해방을 맞이한 후, 다시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지나온 50년의 역사, 그리고... 주먹을 힘차게 머리 위로 뻗으며 우리 문제를 해결하라며 외쳐온 20년의 역사, 그 역사를 평화비에 담아 수요일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 평화로를 지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며, 전범국 일본을 엄중하게 지켜볼 것이다.


 


온라인에서도 사람들이 와글와글 거릴 것이다. 일본정부의 편지통에 수천, 수만 개의 편지들이 세계 각국에서 날아올 것이다. 일본정부의 범죄를 폭로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전달될 것이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치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의 예언처럼 분명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높고 단단한 벽이었는데, 1000번의 수요시위에 다다르고 보니 벽에 금이 가고 있다. 이제 곧 작은 금이 구멍이 되고, 문이 되어 변화로, 희망으로 통하는 출구가 될 것이다. 천 번의 수요시위, 천 번의 외침이 완전한 숫자가 되어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쟁의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 천 번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2011년 11월 25일


통일뉴스